가끔 가다 보면, "나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데, 그걸 표현하는 방법에 있어서
내가 판단하기에 "옳지 않은 방법"으로 표현하는 사람들이 있다
(거짓말을 하거나, 논리가 부실하거나..)
이런 사람들이 또 "그 생각"을 퍼트려 열심인 사람이면 더 문제가 되는지라..
(관련글: 인간 광우병)
같은 생각을 가졌음에도 불구하고 논쟁을 해야 할 때가 생기는데,
오늘 같은 경우,
그 사람의 생각과 내 생각이 같음을 먼저 이야기 하고,
"논리의 흐름이 이상하다" 라는 부분을 지적했는데
이 사람은 "내 생각"을 고치려 작정하는 거다.
내가 지적한 부분은 글자 한 자 꺼내지 않고 전혀 새로운 얘기로만,
자신과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는 사람한테 "자신의 생각"을 따라와야 한다고 설파 해 대니..
그러니까. 같이 사과를 먹으면서, 옆에 사과를 날로 먹는 사람에게 "깎아 먹지 그래요?" 라고 했더니
이미 사과를 잘 깎아서 먹고있는 날 보고 "사과가 얼마나 맛있는데요, 님도 드셔보삼" 이러는 꼴이랄까..
이게 좀 대중적인 주제면, "지능 안티구나" 라고 생각을 하겠는데,
지능 안티가 얻을 이익이 있을 정도로 대중적인 주제가 아니기 때문에,
그냥 바보라는 생각이 들게 된다.
댓글과 쪽지를 서너 차례 주고 받았는데도, 이 사람은 귀 막고 앵무새처럼 읊어대니.
슬프다. 적군보다 무서운 아군이여.
1박2일 프로의 "육사시미" 발언이 논란이 되고 있다.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본어 노이로제는 하루이틀의 일이 아니지만,
까려면 좀 제대로 알고 까자.
육회와 육사시미는 전혀 다른 음식이다.
요리법은 물론이거니와, 재료도 다르다.
즉. 음식점에서 "육회"라고 주문하면 "육사시미"가 절대 나오지 않는다.
그럼 "육사시미"가 없어져야 할 음식인가?
육회-육사시미의 관계는 불고기-스테이크 비슷한 관계라고 생각하는데,
그럼 육사시미를 까는 사람들은,
음식점에 가서 스테이크 주문할때 "불고기"라고 외치는지?
오이 피클이 부족할 때, 점원에게 "오이지"를 요구하는지?
그게 아니라면,
"사시미"는 일본어라 안되고, "스테이크"는 영어라서 되는건가?
물론 우리나라의 경우 일제의 흑역사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한국어 표현이 가능한, 이른바 "일제의 잔재"에 해당하는 언어들은
순화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육사시미 같은 경우 대체할 수 있는 표현이 없는 고유의 음식 이름인데,
방송에서 사용했다고 무작정 까는 행위나,
아직도 많은 사람들이 헷갈리는 오뎅을 어묵으로 순화하는 오류등은
고쳐야 하지 않을까
일본에 관한건 흔적조차 지우는 것이 "잔재"를 없애는 건 아닐테니까.
꼭 그래야 한다면 철도부터 걷어내야 할 테고 말이다.
애당초 문제는..
일본 음식도 아닌 것을 "육사시미"로 명명한 것이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미 음식 이름이 "육사시미"로 굳어졌는데,
방송이라고 해서 음식점에서 "육사시미"를 "양념안한육회(?)" 따위로 주문할 순 없지 않은가.
그랬다간 점원이 "육회"에 양념만 안해서 내오는 불상사가 생길 확률이 매우 높다고 본다
(게다가, 싼 음식도 아닌데 ToT)
* 육회와 육사시미 사진은 회사 동료인 BKLove 님이 찍은 사진입니다.
과거에 약 4년정도, 학원 강사일로 입에 풀칠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 놀랐던 기억 중 하나로,
여전히 어른들이 아이들에게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 할 줄 알면 된다"
라는 이야기를 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내가 수학강사를 했다는 이야기를 할 때,
"전 학창시절에 수학이 정말 싫었어요, 더하기 빼기 곱하기 나누기만 할 줄 알면 되지 뭘 그리 어려운 것을 가르친담?"
이라는 이야기를 종종 듣게 되고,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설명하여 분위기를 딱딱하게 굳힐 것인가, (* 대부분 이런 화제는 잘 모르는 사람들과의 회화에서 나오기 때문에, 심각하게 파고들면 분위기가 당연히 굳어진다)
아니면 그냥 웃고 넘겨서 분위기를 수습하고, 그 사람이 나중에 자식들에게 똑 같은 이야기를 하며 그 자식들로 하여금 스스로의 만족에 빠지는 우를 범하게 할 것이가 하는 고민을 하게 하는 경우가 많았다.
수학에, 사칙연산만이 - 사실 이건 수학이 아니고 산수의 범위에 들어가지만 -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그 이상의 것을 제대로 알지 못하기 때문에, 다시말해, 써본 적이 없으므로 필요성을 못 느끼는 것이다.
컴퓨터를 써 본 적이 없는 사람은, "컴퓨터 따위 없어도 세상 사는 것에 문제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것과 똑 같은 현상이라는 얘기다.
컴퓨터를 써 본 적이 없거나, 컴퓨터를 오로지 유희를 위해서만 사용하는 사람들에게는(수학에서 사칙연산만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컴퓨터 따위 없어도 세상 사는 것에 전혀 불편을 느낄 이유가 없다. 하지만 컴퓨터를 유용하게 사용하고 있는 사람들이라면, 컴퓨터가 얼마나 대단한 도구인가를 알 것이다. 그리고 그 유용성은 경험하지 못한 사람들에겐 기를 쓰고 설명해도 이해될 수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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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오래된 기억속의 이야기를 이제서야 꺼내는 이유는,
이 사칙연산의 일들이 조금 바뀌어 현실 - 특히 정치 - 에서 종종 목격되기 때문이다.
멀리 "우리가 남이가"를 외치는 대의민주주의의 의미를 모르는 아저씨나, 뉴타운에 홀리는 욕심쟁이 아줌마들까지 들먹일 필요도 없다.
무심한 듯 시크하게 "정치따윈 관심없어" 라던지 "정치인이란 누구나 똑 같아"를 남발하는 주위의 젊은 친구들에게 하는 이야기이다.
대선 전에 이명박을 찍겠다는 사람들에게, "왜 이명박이야?"를 물어보면, 20%의 답변은 "엄마가 찍으라고 해서" (당시에 난 포항에 있었다.) 라는 논할 가치가 없는 답변을 하였고,
대략 80%의 답변은 "그 사람이 딱히 마음에 들지 않지만, 따로 찍을 사람이 없어서" 라는 답변을 하였다.
그 80%의 답변가들에게 "따로 누가 있는데?"를 물었을 때 그 아이들이 내놓는 답변은 정동영, 좀 더 많은 대답을 할 수 있었던 아이들도 허경영을 벗어나지 못했다.
따로 찍을 사람이 있는지 없는 지는, 도대체 누가 있는지 정도는 모두 알아보고 난 다음에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
사칙연산만을 알고 모든 수학 문제를 풀려는 사람은 그 이상의 것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나름의 만족에 빠져 살 수 있다.
조선일보가 주는 사실을 진실로 알고 있는 사람은, 이 세상이 그렇게 행복해 보일 수가 없을 것이다. 역시 자기만의 만족이다.
태생적으로 부자를 위할 수 밖에 없는 정권앞에서 더욱 궁핍해질 수 밖에 없는 서민들이, 현실은 점점 시궁창으로 변해가도 조선일보에서 읊어주는대로 잃어버린 10년에 대한 욕을 하며 스트레스를 푸는, 그런 만족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명박을 욕하고, 거리로 나온다.
하지만 여전히 차기 대선의 박근혜 지지율이 39.4% 라는 기사를 접하고,
"박근혜였으면 달랐을 거야" 라는 이야기를 심심치 않게 접하면서,
나는 이러한 "정치의 사칙연산" 만이 전부라고 믿는 이들앞에서 여전히 고민한다.
분위기를 굳게 할 것인가. 아니면 그들만의 세계에 안주하도록 할 것인가.
바에서 술을 먹고 맨션으로 돌아오던
일본에 있을 때의 어떤 새벽의 일이다.
큰길가 사거리에서 신호를 기다리고 있었는데,
저쪽에서 구급차가 한대 오고 있었고,
구급차에서는 응급 상황이라고 방송을 하고 있었다.
구급차는 빨간 신호를 받고 있었고,
구급차 좌우로 직진신호를 받던 많은 차들은 방송을 듣고 그 자리에서 정지하더라.
내가 놀라웠던 것은 정지하는 것이 아니었다.
아니, 그것도 충분히 놀라웠지만,
그 보다는 구급차가 전혀 속도를 줄이지 않고 사거리를 통과했다는 거다.
나는 모퉁이에 있었으므로 교통 상황을 모두 알았지만
구급차는 빌딩과 가로수에 막혀 현재 신호를 받는 쪽의 교통상황을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본인은 빨간 신호이지만, 방송을 하고 갈 수 있다는 것은
"상대방이 반드시 멈춰 준다" 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부럽기도 하고, 이런 광경에 놀라 서 있는 자신이 매우 부끄럽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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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 초, 중부내륙고속도로에서의 일이다
서울을 가고 있었는데, 뒤에서 구급차가 와서 차선을 비켜주었다
그런데 구급차는 앞에 1,2,차로의 차에 모두 막혀 내 바로 앞에서
그저 한참을 달리고 있었다.
1,2 차로 차량 그 누구도 비켜 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
구급차를 그렇게 가까이서 본 것은 처음이었다.
구급차는 대부분 선팅이 되어 있는 줄 알았는데
그 차는 뒤쪽 유리만 투명으로 되어 있었다.
그 안에는 환자가 누워 있었고
의사와 간호사로 보이는 사람이 옆에서 처치를 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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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은 이야기 한다,
구급차가 구급차 본연의 일을 할 때보다 그냥 이동하거나
심지어 돈을 받고 택시 영업을 하기도 하기 때문에,
자신은 비켜주지 않는다고.
비켜주지 않으면?
만일 그 구급차가 택시영업중이었다고 하자.
그래서 당신이 비켜주지 않으면, 그게 응징인가?
그래봤자 그 구급차 택시는 다른 일반차량보다는 좀 빨리 갈거다
갓길도 이용할 수 있고 하니까.
당신은 응징했다고 생각할 지 모르지만,
걔내 입장에서는 당신이 비켜주지 않은 것이 별 대수로운 일도 아닌 것이다.
하지만, 그 안에 정말로 위급한 사람이 타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대수로운 일이 되겠지.
소 이야기로 세상이 - 적어도 인터넷에서는 - 뜨겁다
2MB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나로서는,
인간광우병 공포가 이제 거짓에 가까울 정도로 왜곡되어 확대재생산된
도배글들이 무척이나 걱정스럽다
(심지어 한국인은 99%가 '걸린다'라는 단정적인 발언까지 난무하는 걸 보면..)
A 라는 진실이 A' 이라는 거짓으로 변질되었을 때,
2MB와 정부는 거짓임이 명백한 A'이 거짓이라는 것을 밝혀내는, 너무도 쉬운 작업만 하면 된다.
그럼 그때가서 A를 다시 논하기는, 어려워지지
정치공세니 뭐니 하면서 미꾸라지처럼 빠져나가다가,
기껏해야 "유감"을 표하는 정도가 될 테니까..
소 수입에 관한 굴욕적 외교는, 잘못한 게 맞으며,
30개월 이상의 소가 다소 위험할 수 있는 것도 맞다.
그러니까, 잘못된 걸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려면,
다시 말해 "정의"의 편에 서고 싶다면,
스스로가 "정의롭게" 다시말해 똑똑하고 진실되어야 한다는 게 내 생각.
안 그러면 죽도밥도 안되거든..
술은, 마시면 마실수록 는다는 말이 있는데,
이게 잘못된 상식이라고 하네?
생각해 보면, 나도 술은 꽤 자주 먹는 편이지만 술이 딱히 늘었다는 느낌은 없다.
그렇다면, 마시면 마실수록 는다는 말은 왜 나왔을까?
그리고 실제로 주위에도 보면 자긴 그렇다는 사람이 많고 말이다.
(술을 못 하는 사람에게 억지로 술 권할때 딱 하기 좋은 말로 "술은 마시면 늘어, 나도 그랬어"
만큼 좋은게 없기 때문일까? 그런 얘기 참 많이 들은 것 같다.)
아무튼 그래서- 어제 술을 마시면서 곰곰히 생각 해 본 결과, 두 가지의 가설을 만들어 낼 수 있었다.
첫번째, 자극에 - 심리적으로나마 - 익숙해 졌기 때문.
무슨 말인고 하면, 난생 처음 술을 먹는 사람이 술을 한명을 마셨는데, 30% 정도 취기가 올랐다고 하자.
그럼 이 사람은 30%의 취기(자극)을 느끼고 여러 가지 느낌 (겁이 나거나, 기분이 좋아지거나,..)을
가질 수 있겠지?
그리고 시간은 흘러- 이 사람이 매일 술을 마시기를 1주일이 되었을 때,
역시 이 사람이 소주 1병을 마셔서, 역시 30% 정도 취기가 올랐다고 하면
몸은 그대로 반응할지언정, 느낌상은 차이가 있을 거라는,
30%의 취기가 아닌, 그보다 작은 취기를 느끼게 될 거라는 이야기다.
'어? 일주일 전에는 어질어질 했는데, 이제 그렇게 많이 어질어질하지 않아!'
라고 느끼는 거지.
이런식으로 되면 몸은 여전히 힘들더라도, 머릿속에서 느껴지는 알콜의 상대량이 적어져서,
더 많은 술을 먹을 수 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생각 해 보았다.
두번째, 기록
술을 즐기는 사람들을 대충 보면, 많은 사람들이 "주량"을 일종의 "기록" 처럼 생각한다.
그런데, "주량" 이라고 하는 것은 컨디션에 따라 들쭉날쭉해서 어느 날 갑자기 많이 마시게 되는
경우가 생기는데, 위 해당하는 사람들 중에 "그 기록"을 "주량" 처럼 얘기하는 사람들이 있고.
("내 주량은 소주 10병이오" 라고 얘기하는 괴물같아 보이는 사람을 그냥 믿고 술을 먹다가,
두 병째에 맥없이 뻗어버려 사람 곤란하게 만드는 사람을 만나본 적이 있지 않은가?!)
역시 들쭉날쭉의 기록 중에서 자기가 기억하게 되는 기록(주량)은 항상 best record만 기억하는 게
사람이므로 - 그리고 또한 best record라는 게, 원래 위로는 갱신되어도 아래로는 절대로 갱신되지
않는 것기도 하고 - 이 사람 (뿐만아니라 이 사람이 말하는 '주량'을 믿고 있는 주변의 사람들도)은
단지 "기록"이 늘 뿐인데도, 그가 "주량"이 늘고 있다고 생각 할 수 있게 된다.
그래프를 그릴 수 있으면 좋을텐데, 이를테면 어떤 사람이
3-4-3-3-3-4-3-2-5-4-3-4-4-2-3-1-3-3-4-6-4-3-2-3-4-5-3-2-3 병을 마셨다고 하자.
첫째날 "그가 생각하는" 자신의 주량은 세병,
둘째날은 네병,
셋째날은 세병이 아닌, "여전히 네병" 이 된다.
4,5,6,7,8,9 일 째에도 여전이 "네병" 이었다가, (심지어 그 전날 두 병 밖에 못마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일째에 이 사람은 드디어 "주량이 다섯 병"이 되었다고 느끼고,..
평균적으로 세 병을 마실 수 있는 이 사람의 "표면적인 주량"은 무려 여섯 병 까지 늘게 된다.
결국 두 가지 가설 모두 심리적인 부분에서 해답을 찾으려고 노력하였는데,
얼마나 맞는지는 검증 해 보지 못했다.
(주량에 관련된 연구(?)이므로, 검증을 위해선 사람을 골로 가게 만들어야 하는데
그 상황이 썩 유쾌한 일이 될 수는 없으므로, 검증은 무기한 연기(笑) 되겠다)